
AI 생태계에도 가끔 판을 흔드는 ‘메기’가 등장합니다. 연애 예능에서 판도를 바꾸는 메기 출연자처럼, 최근 일본의 인공지능 기업 '사카나AI(Sakana AI)'가 치열한 거대언어모델(LLM) 경쟁 한가운데에 예상 밖의 화두를 던졌습니다.
우리도 미국이나 중국처럼 거대한 AI 모델을 처음부터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소버린 AI(Sovereign AI·인공지능 주권)'라는 단어가 화두에 오를 때마다, 많은 사람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최근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 속칭 '국가대표 AI'를 추진하며 가중치를 초기화한 뒤 백지부터 학습하는 이른바 ‘프롬 스크래치(From Scratch)’를 독자성의 핵심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수십억에서 수천억 원이 들더라도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만이 진정한 기술 독립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사카나AI는 전혀 다른 실용적인 해법을 내놓았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글로벌 오픈 기반 모델을 가져와 자국의 언어, 문화, 안보 요구에 맞게 적응시키는 '사후 학습' 기술을 제시하며, 그 첫 결과물로 일본형 AI 모델 ‘Namazu(나마즈)’를 공개한 것입니다.
Namazu는 일본어로 메기를, 회사명인 Sakana는 물고기를 뜻합니다. 이름에서부터 일본 특화 전략을 위트 있게 드러낸 셈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름만 현지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메기'가 보여준 전략은 우리가 알던 AI 주권의 공식을 보기 좋게 깨뜨립니다. 소버린 AI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만드는' 방식으로만 달성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국가대표 AI 논란이 남긴 질문과 사카나AI가 새롭게 제시한 ‘적응형 사후 학습’ 전략을 함께 놓고, 소버린 AI의 진정한 의미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짚어보겠습니다.

소버린 AI, 국적보다 '통제권'이 핵심
소버린 AI는 단순히 "국산 AI"를 뜻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나 조직이 자기 데이터, 자기 인프라, 자기 모델 운영 방식, 자기 법과 규범 아래에서 AI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한국에서 독자 AI 모델 해프닝을 계기로 "독자 AI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크게 떠올랐습니다. 정부가 독자성의 최소 조건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학습하는 것’을 제시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국가 안보, 공공 행정, 핵심 산업처럼 민감한 영역에서는 외부 의존을 줄이고 설계 과정까지 완벽히 통제 가능한 모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버린 AI의 목표가 무조건 ‘처음부터 혼자 다 만들기’가 되면 비용과 속도에서 뒤처질 수 있습니다. 데이터는 국내에 있는데 모델의 운영 권한이나 안전 기준이 외부에 있다면 실질적인 주권은 약해집니다. 반대로 뼈대가 해외에서 왔더라도 안전 정책, 편향 조정 방식, 서비스 운영 권한을 우리가 쥐고 있다면 그것 역시 강한 형태의 소버린 AI가 될 수 있습니다.
사카나AI가 던진 힌트를 이해하기 위한 AI 핵심 개념
그렇다면 수천억 원을 들여 처음부터 만들지 않고도, 어떻게 우리에게 딱 맞는 AI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AI 기술의 핵심 개념들을 찰떡같은 비유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 파운데이션 모델 (Foundation Model) / 프론티어 모델 (Frontier Model)
- 파운데이션 모델: 글쓰기, 번역, 코딩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다재다능한 '만능 기초 공사'입니다.
- 프론티어 모델: 그중에서도 현재 인류 기술력의 최전선(Frontier)에 있는 전교 1등 AI들(GPT-5.4, Claude 4.6, Gemini 3.1 등) 을 뜻합니다.
- 오픈 웨이트 (Open-weight)
- 유명 셰프(거대 기술 기업)가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개발한 마법의 만능 소스(AI의 뇌 구조)를 대중에게 무료로 공개한 것입니다. 누구나 이 소스를 가져다 자신만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 파라미터 크기 (예: 405B, 120B)
- AI의 '뇌세포(시냅스) 개수'입니다. B는 Billion(10억)을 뜻하며, 405B는 4,050억 개의 파라미터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숫자가 클수록 똑똑하지만 비싼 컴퓨터가 필요합니다.
- 사전 학습 (Pre-training)
- 태어나서부터 대학교까지의 정규 교육 과정입니다. 전 세계의 데이터를 읽혀 세상의 지식을 가르칩니다. 수천억 원이 드는 작업이라 빅테크 기업만 주로 가능합니다.
- 사후 학습 (Post-training) ⭐
- 사전 학습을 마친 천재 대학생을 회사에 맞게 가르치는 신입사원 OJT 및 예절 교육입니다. 욕설을 막고 현지 문화에 맞게 대답하도록 다듬는 가성비 최고의 마법입니다.
- 파인튜닝 (Fine-tuning)
- 사후 학습을 해내는 핵심 기술로, AI의 뇌 구조를 미세하게 나사 조이듯 조정합니다. 다재다능한 요리사를 특정 분야의 '프랑스 디저트 장인'으로 만들거나, 의대 졸업생(일반의)을 수술 기록만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하여 '안과 전문의'로 만드는 과정과 같습니다.
- 벤치마크 (Benchmark)
- AI들을 줄 세우는 수능 시험입니다. AIME, MMLU 같은 과목(시험지)을 통해 수학, 논리, 코딩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합니다.
사카나AI의 'Namazu'
외국산 천재 AI의 완벽한 현지화
2026년 3월 24일, 일본의 사카나AI는 앞서 설명한 오픈 웨이트와 사후 학습 기술을 활용해 일본 사양에 맞춘 시제품 모델 시리즈 Namazu(나마즈)와 채팅 서비스 Sakana Chat을 공개했습니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만든 AI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해외에서 제작된 AI는 만든 나라의 가치관이나 검열 기준이 묻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모델의 경우 특정 정치적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식이죠.
사카나AI는 Llama-3.1-Namazu-405B, Namazu-DeepSeek-V3.1-Terminus 등 해외 최고 성능의 모델을 베이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데이터셋으로 사후 학습을 진행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 성능과 현지화의 두 마리 토끼: Namazu는 벤치마크(수능 시험)에서 원본 모델의 탁월한 기초 능력(추론, 코딩 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동시에 일본어 주요 벤치마크에서도 타사 동급 모델과 동등한 성능을 달성했습니다.

검열 우회 및 완벽한 중립성: 해외 기반 모델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의 72%에 대해 답변을 거부했지만, Namazu는 이 거부율을 거의 0%로 낮췄습니다. 정보 통제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다각적 응답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비용 효율성의 증명: 수천억 원을 들여 처음부터 만들지 않아도, 훌륭한 베이스 모델에 사후 학습을 잘 적용하면 자국에 최적화된 안전한 AI를 구축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GMO 인터넷 주식회사의 클라우드 리소스 지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앞으로의 방향
'프롬 스크래치'와 '개방형 주권', 완벽한 투 트랙(Two-Track)의 완성

국가대표 AI의 독자 AI 논란이 우리에게 “정말 처음부터 만들었는가”라는 과거지향적 질문을 던졌다면, 사카나AI의 Namazu는 “꼭 처음부터 만들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맞는 AI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가”라는 미래지향적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은 힘들게 '프롬 스크래치(처음부터 만들기)'를 할 필요 없이, 사카나AI처럼 외국 AI를 가져와 고치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카나AI가 보여준 성과는 기존의 방식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AI 주권 전략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로 보아야 합니다. 글로벌 오픈 웨이트를 활용하는 전략은 비용과 속도 면에서 압도적으로 훌륭하지만, 국가적 차원의 핵심 전략으로 모든 것을 여기에만 의존하기에는 분명한 리스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첫째, 블랙박스와 보안 취약점의 한계입니다. 남이 지어놓은 건물 뼈대에 인테리어(파인튜닝)를 다시 한다고 해서, 내부에 숨겨진 백도어 등 근본적인 취약점까지 사후 학습만으로 100%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 둘째, 지정학적 리스크입니다. 오픈 웨이트 모델은 언제든 거대 빅테크 기업의 전략에 따라 라이선스 정책이 바뀌거나 상업적 이용이 차단될 수 있습니다. 뼈대를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외부 충격에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 셋째, 인재 생태계 유지입니다. 가성비만 따져 '파인튜닝'에만 의존하게 되면, 정작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최상위 기반 모델 설계자들은 고사하게 됩니다. 엔진 설계 기술 없이 정비만 하는 국가는 기술 종속국에 머물게 됩니다.

결국 한국이 지향해야 할 소버린 AI 전략은 이 두 가지를 영리하게 섞는 투 트랙 Two-Track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 안보, 국방, 공공 행정, 핵심 의료 등 외부 의존을 완벽히 차단하고 블랙박스 속까지 철저히 통제해야 하는 민감한 영역에서는 기존처럼 프롬 스크래치 기반의 독자 모델을 뚝심 있게 키워가야 합니다. 반면, 그 외의 수많은 일반 산업 영역과 발 빠른 서비스가 필요한 곳에서는 사카나AI가 증명한 글로벌 오픈 생태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비용과 속도의 혁신을 이뤄내야 합니다.

모델의 뼈대가 바다 건너에서 왔더라도 안전 정책, 편향 조정 방식, 서비스 운영 권한을 한국이 직접 쥐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훌륭한 소버린 AI입니다.
대한민국의 AI 미래는 '무엇을 직접 만들 것인가'라는 좁은 강박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밝아집니다.
사카나AI가 보여준 실용적인 개방형 주권을 폭넓게 취하되, 어떠한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뿌리가 되어줄 자강自强을 병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가오는 AI 패권 경쟁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빠르고 굳건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적인 해답이 될 것입니다.
